2015년 12월 10일 목요일

르네상스 시대의 가톨릭 교회의 도덕성 2.

르네상스의 시대.

교회세력이 신장함에 따라 교회의 종들은 점차 향락적 인간으로 변하게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 교회의 권력을 이용하게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고백성사를 이용한 자신의 성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였다.


고백성사

가톨릭 신자가 알게 모르게 범한 죄를 성찰(省察)·통회(痛悔)·고백·보속(補贖) 등의 절차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는 성사.

7성사의 하나로, 고해성사(告解聖事)의 바뀐 말이다. 첫째 성찰이란, 고백성사를 받으려고 할 때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지은 죄를 자세히 생각해낸다. 다음 통회에서는, 하느님 앞에 죄를 지은 자로서의 나약한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자기의 마음을 열어 죄를 고백한다. 네째번의 보속은, 죄를 보상하는 마음으로 기도, 사랑의 실천, 생활의 개선 등에 힘쓴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과의 화평 관계에서의 일탈(逸脫)을 의미하는데, 이 고백성사를 통해 이 화평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본래 고백성사의 의미는 위 설명과 같았다.

하지만 욕망에 가득찬 사제들에게는 고백성사의 고백석은 여자를 유혹하는데 있어서는 최적의 장소였다.

신도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할때 신부는 내밀한 질문까지도 던질수 있는 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질문 자체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직무라고 신도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사제들은 그와 같은 권리를 이용해서 교활하게 죄인들의 '성생활'을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그 내밀하고도 은밀한 자백을 듣는 재미에 탐닉했다. 그렇게 그들은 여러가지 교활한 질문을 통해서 순진무구한 처녀나 남의 아내 등으로부터 은밀한 사생활을 알게되었고, (가슴의 크기부터 자위방법, 성감대까지) 한술 더떠 수많은 여자들이 고백성사 때 이성과 정서를 압도하는 교회의 그 막강한 권력과 성스러움(?)에 기가 꺾여서 정신적인 정조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정조까지 잃게되었다.

사제들은 자신들의 유혹이 성공하기 어려우면 여러가지 책략을 썼을뿐만 아니라(각종 미약제와 수면제, 협박, 회유 등) 폭력을 쓰면서까지 충족시켰다.

여러가지 책략이 통하지않은 여자에게는 사제들은 사제의 자택, 교회의 사제실, 고백실 등에서 강제로 능욕하고 강간하였다.

그리고 사제들은 자신의 육욕(성욕구)의 희생자들에게는 죄악도 미덕이 될 수 있다고까지 선전했다.

(여성의 숨겨진 욕망. 그중에서 특히 성적인 욕망을 죄악처럼 얘기하면서도 고백를 통해서 미덕이 될수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무지한 여자들은 고백신부의 성욕구에 자발적으로 다가가서는 자기들이야말로 신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다.

한 예로 타이너 형제의 자료집에서는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파도바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은자 안시미로라는 자는 자기에게 고백하러 온 처녀들을 닥치는 대로 능욕했다. (적당히하지않고 마구 들이대다가는 결국 들통난다)

그가 저지른 죄로 고소를 당해서 피해자들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 가운데에는 그 도시 명문가의 많은 처녀들과 아내들의 이름이 포함되어있었고, 심지어 그를 심문했던 서기의 마누라까지 끼어 있었다.

또한 당시 브레시아에서는 성직자들이 고백하러 온 여자들에게 당신은 나에게도 부부관계에 대한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10번 부부관계당 나와 한번의 관계를 맺어야한다라는 논리)'


고백성사때 뿐만 아니라 사제들은 다른 곳.

수도원과 수녀원에서도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해결하였다.

수도원에서는 일하는 하녀들 뿐만 아니라 수녀원에 들어온 여자들은 종종 상대를 가리지않고 여러남자들에게 몸을 맡겨야 했다.

이 당시의 수도원과 수녀원은 결코 정진과 금욕과 기도로 충만한 신성한 장소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마음껏 인생을 즐기는 곳이 바로 수도원과 수녀원이였다.

많은 부와 권력이 집중 되다보니 항상 풍족스러웠고 굳이 금식과 금욕을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인생을 순간순간 즐기기위해서는 축연을 뺄수 없는데, 이 축연에는 술과 춤이 전부였다.

게다가 축연에서는 사제들끼리. 즉 오직 남자끼리의 춤과 술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로써 여자들과 춤과 술을 마시면서 즐겼다.

이에 대한 한 예로 카이저베르크의 가일러는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이렇게 적고있다.


'수도원에서는 제 1의 미사(헌당식)의 경우, 또는 다른 연회가 열릴 경우, 여자들은 수도원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수도사들과 함께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도사의 방이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몸을 감춘다. 

따라서 이러한 축제는 쓸데없는 낭비이며 결코 허락할 만한 자리가 아니다. 진정 자신을 요조숙녀로 생각하는 여자라면 남자들이 사는 수도원 같은 곳에 가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수도원은 흥청거리는 연회가 벌어지는 장소라고 할수 있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여자라 할지라도 수도원에 갔다오면 그 대부분이 음란한 여인이 되기 마련이다.'


이렇듯 교회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음란한 행위를 마음껏 즐겼다.



나의 생각

나도 고해성사 하고싶다. 하하

이건 시대를 막론하고 등장하는 듯.

힘의 논리로 강한자가 약한자를 억압하고 이득을 취하는 것.

특히 저런 폐쇄된 곳에서 강한자가 약한자를 보호할수 있지만

위의 이야기에서 보듯 마음놓고 착취할수도 있다는 것.

사실 종종 우리 주변에서도 뉴스로 나오지 않는가?

사내 성추행이나 초등 선생이 어린 제자와 성관계를 맺은후 사랑이라고 하지는 않나.

그런데 내가 생각한 강한자라는건 권력의 유무는 물론이지만

지식과 지혜, 경험, 나이, 상하관계 등등의 복합 종합적인 힘의 논리라고 할수 있겠다.

이상하게 어느 사건이 발생했을때 피해자를 탓하는 인간들이 있다.

왜 저런 짓을 당하냐고 혹은 당할만하다고.

정말 뇌의 용량이 떨어지는 인간들이다.

아니면 정신적 미숙아라던지.

모든 인간들의 입장들은 다르다.

경험도 지식도 지혜도. 

강함의 유무는 상대에 따라 다르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만의 잣대로 판단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도록하자.

피해자의 입장과 가해자의 입장도 우리 사회 보편적인 전체적인 상황도 판단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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