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중기 전유럽에 대유행한 이래 흑사병(黑死病:Black Death)이라고도 한다.
현대에도 에이즈라는 죽음의 전염병이 있지만, 그것은 세계 전체를 뒤바꿀 만큼 무시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었던 근대 이전 사회에서 커다란 전염병의 발생은 사회적ㆍ경제적 변화 뿐만 아니라 사람의 심성까지도 바꾸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커다란 전염병이란 바로 중세 시대에 유럽에 유행했었던 흑사병(Black Death)이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발생했던 모든 재앙들 가운데에서도 흑사병은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흑사병이 있기 전의 전염병들은 맹렬했지만 대체로 발병 기간이 짧았고 좁은 지역에 한정되었었다. 이와 달리, 예외 없이 불과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에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은 대략 2,500만 명에서 3,500만 명에 달했다. 이것은 그 당시 전체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할 만큼 많은 수이다.
소설 <페스트>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에게 흑사병은 부조리, 사회 악의 상징이었다.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언제고 다시 돌아 오기 때문에 인간은 이에 맞서 싸우고 대항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카뮈는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일러 주기 위해서 또 다시 저 쥐들을 어떤 행복한 도시로 몰아 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 고 소설 <페스트>에서 말했다.
카뮈의 경고처럼 중세 시대에 흑사병은 도저히 맞서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병이었다. 인구 증가의 추세가 멈추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하여 봉건 사회가 붕괴의 징조를 뚜렷하게 보이게 된 14세기 중엽에 발생한 흑사병은 백년 전쟁과 함께 중세의 종지부를 찍게 한 최대의 사건이었다.
어떤 재앙은 너무나 갑자기, 그리고 너무나 강력하게 몰아 닥치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재앙에 대해 채 알아 보기도 전에 순식간에 죽어 나가기도 한다. 그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흑사병은 정말이지, 무서운 재앙이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그런 재앙이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 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원인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다. 더구나 언제 자기 차례가 올 지 모른다. 운이 좋아 목숨을 부지한다면, 그저 이 재앙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흑사병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존재가 언제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릴 지 모르는 상황, 그리고 언제 낫으로 자기 몸을 슬쩍 건드릴 지 모르는 상황 말이다. 흑사병이 퍼진 것은 재앙이지만, 병 그 자체는 공포의 일부였다.
이 문제의 흑사병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14세기 이전에는 이 전염병이 생긴 일이 없었으므로 멀리 아시아나 이집트 등에서 발생해 유럽에 옮겨 온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흑사병은 1334년, 중앙 아시아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유럽에까지 퍼지게 된 까닭은 1346년 경의 카파 성(오늘날 러시아 남부의 페오도이야) 전투 때문이었다.
성을 공격하던 킵차크 칸국(몽골의 한 부족)의 병사들이 자꾸만 죽어 가자 지휘관들은 돌을 쏘아 보내는 기구를 사용해 부패한 병사들의 시체들을 성벽 안으로 날려 보냈다. 카파 성 안에는 이탈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성을 탈출하여 흑해를 거치는 지중해 항로를 따라 고국 이탈리아로 피난갔다. 이 때, 그들과 함께 흑사병균이 유럽으로 옮겨 들어 왔던 것이다.
1347년 경에 흑사병이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만연하였다고 한다. 결국 흑사병균은 상인들의 옷이나 물건 등에 묻어서, 혹은 배에 같이 탄 쥐벼룩에 물린 쥐나 이미 감염된 환자가 뱉은 가래침 따위를 통해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전해졌을 것이다.
1347년, 가을에 이탈리아를 강타한 흑사병은 같은 해 말에는 마르세유와 아비뇽을 전염시켰고, 1348년에는 프랑스 전체를 휩쓸었다. 예컨대 흑사병으로 인해서 당시 5만에 육박하던 피렌체 시의 인구는 무려 5분의 1로 줄어 들었고, 파리 시의 인구는 15만에서 5만이 죽었다고 한다.
1349년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도 상륙하여 이듬 해에는 영국 전체를 공포로 몰아 넣었고, 영국은 거의 절반의 인구를 잃었다. 이 때 스코틀랜드는 적국인 영국이 흑사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그들을 물리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다. 영국인들을 공격했던 스코틀랜드 병사들 역시 흑사병에 감염되었고, 고국으로 돌아 온 병사들에 의해 이 병이 퍼져 나가 스코틀랜드 전체가 흑사병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350년에는 흑사병이 북유럽을 거쳐 아이슬랜드와 러시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흑사병이 빠른 속도로 전염된 이유는 당시 활발한 무역에 의한 잦은 왕래와 도시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이었다.
수년 간에 걸친 흑사병의 유행은 전 유럽에 엄청난 결과를 몰고 왔다. 물론 흑사병의 화를 면한 곳도 없지 않았으니 도시와 농촌, 신분이나 성별의 구별 없이 모든 유럽인들을 죽음의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인구가 줄어 들은 유럽에는 무시무시한 침묵과 신음 소리만이 널리 퍼져 있었다.
흑사병의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무엇보다도 인구가 밀집했던 도시 지역이었다. 무려 도시의 인구의 절반이나 감소되었다. 병이 확산되어 감에 따라, 도시 밖에 세워진 공동 묘지에 시체를 묻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시골에서도 그 영향은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나타났다. 땅을 경작할 노동자들이 줄어 듬에 따라 농토는 황폐해져 갔다. 가축들은 떼 죽음을 당했다. 독일에서는 경작을 하지 않는 땅이 60%를 넘었다. 카스티야 지방의 경우,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위험할 정도로 시골의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 경제 전체가 농업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 사회에서 주민 수의 감소는 곧 식량의 감소를 뜻했다. 거의 위험 수준에 도달한 주민 수로 인해 땅을 황폐해졌고,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일단 유럽 전역에 전염된 흑사병은 인간과 흙과 공기를 더럽히고 생명체를 가차없이 쓰러 뜨렸다. 이 무렵에는 굳건한 성채도, 교회도, 수도원도, 학교도 비위생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환자가 발생한 집에는 병균이 나오지 못하게 하느라고 문을 걸고 못질을 하거나 불을 질렀기 때문에 산 채로 불타 죽는 환자도 많았다. 그러나 못질을 하거나 집을 불태우는 것도 소용이 없다고 느끼자 사람들은 흑사병에게 언제 어디서 붙잡혀 쓰러질 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싸여 마을이나 도시를 탈출하였다. 도망갈 때는 병균이 떠 다니는 공기를 직접 대하지 않으려고 하얀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죽음의 공포에는 성직자도 어쩔 수 없었는지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고 남은 자들의 마음을 달래 주어야 할 성직자도 간간이 이에 섞여 총총히 마을을 떠났다. 폐허가 된 마을 안에는 야생 짐승들이나 강도들, 거지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흔히 가난하거나 허약한 사람을 주로 희생자로 삼았다. 프랑스를 강타한 흑사병 역시 가난한 이들을 청소하듯이 깨끗이 사라지게 했다고 전해진다. 스스로를 잘 지킨 부자들은 질병을 피해 가거나 가난한 여인을 사서 흑사병이 지나 간 집에 거주케 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했다. 이러한 것으로 우리는 질병의 계급성을 엿볼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고 생각했던 농부들은 곡식을 심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그냥 평범한 유행성 전염병이 아니었다. 윌리엄 랭거에 따르자면, "중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은 흑사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하였다."
길가의 여인숙들이 모두들 문을 닫았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집시들처럼 야영을 하며 스스로 사냥해서 음식을 마련해야만 했다.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지 않은 채, 주로 성당이나 수도원에 함께 모여 미사를 드려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희생도 컸다고 한다. 그 당시 평신도들의 존경을 듬뿍 받았고 쓸모 있는 교회의 일꾼들이었던 교구 사제들이 100명 이상 사망했다. 교황청만 해도 추기경들의 절반이 쓰러졌다고 한다. 인력이 부족해져도 한참 부족해지자 교회는 속수무책의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라틴어를 구사할 성직자의 수가 적어졌기 때문에 모국어로의 이행이 급속히 이루어져 결국은 르네상스로의 길을 예비했다고도 한다.
흑사병은 또 한 명의 성인을 추가하는 역할도 했다. 성 로치는 선 페스트 환자들의 수호 성인이다. 몽펠리에 출신인 그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흑사병이 창궐하는 동안 환자들을 간호하다가 자신도 그 병에 전염되었다. 혼자 쓰러져서 죽어가던 성 로치는 신의 가호로 소생되는 기적을 일으켰다. 롬바르디아에서 그는 외국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힌 뒤, 거기서 사망했다. 여기서 우리는 치명적인 전염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뒤, 결국은 죽음에 이른 성인의 한 예를 다시 묵도하게 된다.
과장 없이 유럽인의 3분의 1이 감소하였으며 그 후에도 전염병은 심심찮게 재발하여 1400년 경의 유럽 인구는 흑사병의 발생 이전에 비해 3분의 1 내지 2분의 1로 감소하였다. 당시 교황청은 사망자 수를 4,486명으로 추산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흑사병은 더욱 유럽을 유린했고, 죽음의 춤은 그 시대의 미술에 새로운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다. 깡충깡충 뛰며 히죽 거리는 해골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을 무덤으로 끌고 갔다.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럽에서 흑사병 이전의 13세기 수준의 인구를 겨우 회복한 것이 30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 흑사병은 인구를 감소시키고 유럽의 사기를 전반적으로 저하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중세 붕괴를 촉진하였다.
원래 흑사병은 페스트(pest)의 일종인데 그 중에서도 폐(肺) 페스트를 가리킨다. 그 외에도 선(腺) 페스트와 피부 페스트가 있는데 당시 유행은 초기에는 선 페스트가, 나중에는 폐 페스트가 유행하였다. 그 증세를 보면 선 페스트는 머리, 겨드랑이, 사타구니로 병균이 침입하여 온 몸에 심한 열이 나면서 떨리고, 2~3일 후에는 정신을 잃고 횡설수설하다 죽어 간다. 사망률은 지금도 50~70%에 이르고 있다.
폐 페스트의 경우는 병균이 폐에 침입하여 피를 토하고 40도 전후의 고열을 내고 호흡이 곤란해지면서 정신을 잃는다. 대부분 발병한 지 24시간 이내에 사망하게 되는데, 이 폐 페스트를 흔히 흑사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망 직전에 폐 페스트 환자는 피부가 흑색이나 자색으로 변하고 선 페스트에 비해서 사망률이 훨씬 높다는 점에서였다.
페스트 균이 발견된 것은 19세기 말, 파스퇴르에 의해서였으니까 중세 유럽인들이 페스트의 발병 원인과 치료법을 알았을 리가 없었고 그들이 취한 조치는 빈번히 역효과를 낼 뿐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치료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인간의 배설물을 모아 자루나 주머니에 넣고 목에 건다. 물론 냄새가 지독하기는 하겠지만, 의사들은 그 냄새가 전염병으로 더러워진 공기를 몰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2. 인간의 소변으로 목욕한다. 이 경우에도 역시 그 지독한 악취가 효과를 발휘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사용했을 때는 환자에게 또 다른 질병을 안겨 주는 경우가 많았다.
3. 거머리를 염증이 생긴 신체 부위에 붙여서 나쁜 피를 빨게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히려 환자를 더욱 약하게 만들고,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4. 말린 두꺼비 혹은 말린 도마뱀을 부어 오른 부위에 붙여서 독기를 몰아 내게 한다. 그러나 흑사병균 때문에 염증이 생길 정도가 되면 이미 때는 늦었다고 할 수 있다.
5. 버터와 라드(돼지 비계를 녹여 만든 기름)를 자주색으로 부어 오른 부위에 바른다. 또는 강아지나 비둘기의 피를 이마에 바른다.
6. 종기가 난 부위를 칼로 짼 뒤, 시뻘겋게 달아 오른 부지깽이를 열린 상처 안으로 집어 넣는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환자의 병이 낫기는 커녕 급작스런 충격을 받은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7. 독성이 강한 비소를 먹는다. 이 역시 치료는 커녕 환자를 죽이는 결과를 낳고는 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설사 흑사병이 낫더라도 결국은 비소 중독으로 사망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8. 환자의 방 한 가운데에 신선한 우유나 양파 한 접시를 놓아 방 안을 깨끗하게 정화한다.
9. 잘게 부순 에메랄드를 삼킨다. 이 방법은 죽는 방법치고는 무척이나 비싸 보이는데, 의사가 진짜 에메랄드를 사용해서 환자를 치료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부러 사기를 치는 사이비 의사들도 물론 있었지만, 양식적인 의사라고 해도 에메랄드씩이나 구할 만한 돈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생존자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단지 갑자기 쓰러져서 헛소리를 하다가 죽는 환자를 속수무책으로 지켜 보다 매장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매장을 거들었던 인부와 성직자조차 전염되어 쓰러지자 시체는 물론 쓰던 물건까지 불태우는 것이 살아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흑사병의 원인을 몰랐던 탓으로 공포는 한층 더 가중되었다. 흑사병의 원인에 대한 각종 설들이 난무했지만 대부분 허황된 것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여 약초를 태우거나 수액을 구해서 마시는 일도 있었다. 또 신이 내리는 벌이라고 믿은 이들도 있어 흑사병이 유행하는 동안 기도만 하면서 성스럽게 죽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파리 대학교의 의학부는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 이변의 결과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널리 유포된 끔찍한 유언비어는 누군가가 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평소 증오의 대상이나 집단에 대한 복수가 행해졌고, 속죄를 부르짖는 신비주의 성향의 이단파들도 발생하였다.
특히 유다인들이 샘이나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은 대규모적인 유다인 대학살을 가져 왔다. 특히나 유독 유다인만이 사는 곳에는 병에 전염되지도 않고 죽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특히나 독일인들의 의심은 한층 더 심해졌다. 그래서 동족을 잃은 독일인의 슬픔이 곧 유다인에 대한 질투와 증오로 바뀌어져 당시 수많은 유다인들이 이유도 모른 채 독일에서 애매하게 생매장되거나 타 죽어 갔다. 유다인들이 이렇게 당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도들이 평소에 미워해 온 이교도들이였다는 점과 지금도 그렇지만 유다인들은 상술이 뛰어나서 돈을 너무 잘 벌었기 때문이었다. 유다인 학살이 점점 확대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교황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9월 26일, 이같은 소문을 일축하는 칙서를 내리면서 유다인들을 보호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독일인들의 만행을 중지시키지는 못했다. 참으로 끔찍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왜 모든 유럽인을 공포와 죽음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흑사병이 유독 유다인에게만은 그 위력을 떨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당시의 유럽인에 비해 유다인은 율법서에 나오는 말씀대로 정결케 하는 예법에 따라 몸을 자주 씻어 병에 대한 예방력을 크게 했으며, 전염병이나 나병 환자는 가족이든지, 아니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격리시킴으로써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기 막힌 사건은 이단 종파들의 광적인 행동이었다. 흑사병의 물결을 막기 위한 교회의 종교적인 기원이 실패하자 교회에 불만이 생겼고, 그래서 흑미사(검은 미사) 같은 반 그리스도교적인 행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어떤 광신자들은 완전한 알몸이거나 반 나체의 남녀가 성가를 부르며 손에는 십자가와 못이 박혀 있는 가죽 끈을 들고 도시와 도시를 돌아 다녔다. 그들은 거리를 다니면서 그 가죽 끈으로 미리 규정된 의식에 따라서 자신의 맨살을 채찍질 하여 살점이 찢어지고 온 몸이 피 투성이가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을 변태 성욕자들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어이 없는 행동은 흑사병과 함께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 유럽 각지로 번져 갔다. 이들은 흑사병을 신벌이라고 여기고 자기 몸을 학대하는 이러한 고행을 통해 신의 노여움을 푼다는 것이었다. 신의 노여움이 꼭 알몸의 남녀가 자신의 몸을 학대해야만 풀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것이 흑사병을 막고자 하는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1349년 10월, 교황은 이들을 비난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많은 이들이 이단 심문관들에게 끌려 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거나 화형을 당했으며 가두행진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흑사병 이후 그림에는 최후의 심판이나 지옥이 소재로 많이 채택되었으며 특히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이 더욱 강해졌다.
이렇듯 중세 유럽의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고 모든 유럽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흑사병도 1348년을 고비로 천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이는 도시의 대화재로 인하여 목재 건축물이 석재로 바뀌거나 하수구 정비 등을 통해서 위생이 개선되어 쥐벼룩을 막음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신의 뜻에 힘 입어 흑사병이 물러간 것을 감사하는 기념비가 유럽 도처에 남아 있어 당시의 흑사병을 증언해 주고 있다. 살아 남은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는 후세 사람들이 이 일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흑사병에서 살아 남은 이들은 자신들이 겪은 무시무시한 경험을 잊지 위해 파티를 열었다. 이런 파티는 그 후 수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열렸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맹목적인 기쁨이 넘쳐 났으며, 그들은 그 무시무시했던 세월의 기억들을 완전히 지워 버리기 위해 흥청망청 거렸다.
그러나 흑사병 폭풍 후, 유럽의 경제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흑사병으로 노동 인구의 반이 죽었다. 유럽을 다시 복구할 식량과 원료를 충분히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남은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들은 더 이상 속박받는 무기력한 농노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노동에 대하여 어떠한 가격도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상품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심각한 노동력 부족은 높은 임금, 높은 제품 생산 비용, 그리고 도망치듯 뛰어 오르는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많은 회사들이 파산했고, 지은 재산을 잃었다. 노동 집약적이던 봉건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14세기 말부터 진행된 한자 상권의 쇠퇴도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경제적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라고 볼 때 인구와 경제, 흑사병의 삼각 관계가 다시금 선명해진다. 결국 흑사병이 창궐함으로써 인구가 감소하여 임금은 상승하고 농산물 가격은 하락했다.
한편, 이러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강제로 임금을 동결하고 농노 해방을 중지시키는 봉건 영주들도 있었다. 이러한 대응책은 지위 향상을 꾀하려는 농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 왔으며, 농민 봉기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농민 봉기들은 대부분 실패하였지만, 서유럽에서 차츰 농노제가 사라져 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유로워진 경지는 다시 목초지로 전환되어 가축이 늘어나고 육식의 음식 문화는 회복되었다.
도시에서는 살아 남은 사람들이 죽은 귀족이나 상인의 재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수했다. 그리고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텅 빈 도시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도시의 운영권도 이 과정을 통해 재산을 획득한 신참자들에게 돌아 갔다. 한 마디로 도시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완전히 흔들릴 정도로 바뀌었다.
흑사병은 유럽 역사의 진로를 바꾼 대격변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경제 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교회가 세속을 능가하는 우월한 위치로 올라선 데는 과거에 유행한 역병들이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흑사병 같은 엄청난 재앙이 2천년 동안 굳건한 토대를 쌓은 교회의 권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럽 전역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던 지배력 덕분에 그런 폭풍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의 권위는 흑사병 때문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교회가 질병 앞에 무기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흑사병이 프로테스탄트교의 출현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또한 유럽의 문화는 두려움, 죽음, 죄를 기본 소재로 하여 변화하였다.
의학적 무지에 의해 흑사병의 피해가 더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흑사병은 상업의 발달로 인한 물자 교류의 확대에 의해 급속히 퍼져 갔다. 이것이 당시 농업 생산력의 정체로 나타난 봉건 경제의 전반적인 위축과 맞물려 커다란 희생을 초래했다. 따라서 어찌 보면 흑사병은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길목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고통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생각
이 글을 보면서 인간은 역시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별별 지x를 다 떨수 밖에 없다는거.
온갖 미신뿐만 아니라 사기꾼들이 넘쳐나게 되고 불확실한 내용을 맹신할수 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동정심만 갈뿐.
저때 태어나지않은게 다행이다.
한편 지식와 지혜를 갖추면 저런 지x를 안해도 된다는거.
인간은 불확실한 것에 불안감을 느끼며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다면 공포에 빠져서
무슨짓이든 한다는거.
그래서 어떤일이든 이성을 차려서 알아내자.
원인이 무엇인가. 과정이 무엇인가. 해결책은 무엇인가.
의심하자. 호기심을 갖자. 저런 심각한 일에 최대한 빠지지않거나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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