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가 음란을 범했다면, 그것은 진정 순결의 서약을 파기한 행위인가? 아니다. 순결의 서약이란 처자를 거느리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아무리 간음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가 독신생활을 계속했다면, 순결의 서약을 파기한 행위라고 할수 없다.'
(이 당시 순결의 서약이란 수도사들과 수녀들에게는 동거는 허용하되 가족이라는 관계를 맺어서는 안되는 것이 순결의 서약이다.
즉, 성적 향락을 즐기면서 열심히 성관계를 가져도 결혼이라는 부부생활만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제르송은 다만 사제들의 간음행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제한만은 두었다.
'간음행위를 아무리 몰래 주일이 아닌 날, 신성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미혼자와 행했다면, 그리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제들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계속된 요구로 제르송은 또다시 이렇게 선언한다.
'교구의 주임사제가 첩(사제의 첩)과 함께 잔다면, 물론 그것은 교구(가톨릭교회를 지역적으로 구분하는 한 단위)의 주민들에게 커다란 수치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자기 교구에 사는 젊은 처녀들의 순결을 망치기보다는 오히려 그 편이 죄가 가벼울 것이다.'
한마디로 (사제의)첩을 두므로해서 젊은 처녀의 순결을 보호하는것인데 좋은거 아니냐?라는 뜻이였다.
12세기 초반 쾰른의 도이츠 수도원 원장 루페르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교회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사제들이 결혼을 삼가고 있다고해서, 특별히 그들이 금욕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향락이 부부의 정리에 속박되지 않아도 좋았기 때문에 더욱 서슴지 않고 성애(성행위)를 즐길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쾌락의 대상을 이 여자로부터 저 여자로 옮겨지는 경우가 더욱 빈번해졌다.'
16세기에 들어서는 사제들의 축첩행위(첩을 두는 행위)가 얼마나 극을 달했는지 타이너 형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563년 오스트리아 남부 세습령의 수도원 다섯군데를 임검했을 때, 관리는 그곳의 모든 수도원에서 사제들이 첩, 본처(정식결혼을 선언한 사이는 아니다), 자식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베네딕트파 소속 쇼텐 수도원에서는 9명의 수도사가 7명의 첩, 2명의 본처, 8명의 자식을 데리고 있었으며, 역시 베네딕트파 소속 가르스텐 수도원에서는 18명의 수도사가 12명의 첩, 12명의 본처(남자 18명에 대하여 24명의 여자가 있었다), 19명의 자식을 데리고 있었다.
또한 글로스터노이부르크의 수도원에서는 7명의 정규 성직자가 7명의 첩, 3명의 본처, 14명의 자식을 데리고 있었으며, 아글라르의 수녀원에서는 40명의 수녀가 18명의 자식(고아가 절대 아니다)을 키우고 있었다...'
또한 1520년경에 발표된 뉘른베르크의 시 "진리의 승리"에서는 수도사들의 타락상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 여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남자는
신분고하에 따라 두세 명의 여자도 가질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버리고,
능력껏 계속 다른 여자로 바꾸면 그만이기 때문.'
나의 생각.
어느 종교를 떠나서 어느 국가를 떠나서 어느 시대를 떠나서
권력. 힘을 가진 집단은 타락할수 밖에 없다.
초창기에는 정의롭고 평등하고 이상적일순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이 바뀜에 따라
겉은 번지르르해도 속은 썩어가고 있는것.
물론 썩는 속도는 내부와 외부 요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혹은 자체정화도 하기도 한다.
그 집단의 생명력은 지속적으로 유지 될수도 있고
완전히 사라지기도 한다.
심지어 다른걸로 탈바꿈하므로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 그 권력을 유지하기도 한다.
겉이 성스럽다고해서 절대 속까지 그런건 아니다.
일부만 성스럽고 잘 보이지않는 부분은 타락할수 있기 때문에.
항상 생각하자. 의심하자. 절대 완벽한건 없다. 인간의 손이 닿는한.
PS. 아... 아쉬운데. 저 시대에 성직자로 태어났으면 꽤나 즐거운 인생을 살텐데 말이야. HA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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